(쉬어가는 챕터)K의 책 읽기 -1.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2. 린스타트업
밤이 깊으면 K는 습관처럼 책장 앞에 선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서 있는다. 손가락으로 책등을 천천히 훑으면서, 오늘 나는 무엇이 필요한지 가늠해본다.
배가 고픈 사람이 냉장고 앞에 서서 먹고 싶은 게 뭔지 모르는 것처럼, K도 가끔 자신이 무엇에 허기진지 알 수 없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책장 앞에 가서 책을 고른다.
K는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지 않는다. 형광펜도 쓰지 않는다. 대신 마음이 멈추는 문장 앞에서 잠시 숨을 쉰다. 그 정지의 순간, 이것이 자신이 찾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중에 다시 펼쳤을 때, 어느 페이지에서 자신이 멈췄는지 책이 기억한다. 책등이 조금 더 벌어진 곳, 종이가 미세하게 손때를 머금은 곳. 그 흔적들이 그때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오늘 K가 꺼낸 책은 두 권이다.
첫 번째 책 —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데이비드 베일스 · 테드 올랜드 지음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밤이었다.
K는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노트북 화면 앞에 앉아 있었는데, 두 시간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기획서 첫 문장을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또 지웠다. 처음엔 단어가 문제인 것 같았다. 그 다음엔 구조가 문제인 것 같았다. 한참 후엔 자신이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이걸 할 사람이 아닌 걸지도 몰라.'
그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를 잡는 순간, K는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책장으로 걸어가서 손에 잡히는 책을 꺼냈다. 그게 이 책이었다.
책의 첫 문장은 이랬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두려움과 마주하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컴퓨터 자판이나 하얀 캔버스를 앞에 두고 멍한 시간을 보내봤거나,
오선지나 이젤과 씨름을 벌여본 사람은 알고 있다.
‘예술ART’과 ‘두려움FEAR’은 동의어나 다름없다는 것을."
K는 거기서 한동안 멈췄다.
저자들은 말한다. 예술가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재능의 부재가 아니라고. 두려움이라고. 그리고 그 두려움은 진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오지 않는다고. 오히려 무언가를 간절히 만들고 싶은 사람, 그것이 좋은 것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감각이라고.
K는 자신도 모르게 책을 가슴에 안았다.
두려움이 없는 예술가는 없다.
완성된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순간까지, 아니 내놓고 난 후에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익숙해질 뿐이다. 두려움과 함께 걷는 법을 배울 뿐이다. 저자들은 그것을 담담하게, 그러나 깊이 있게 이야기한다. 위로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어조로.
책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도자기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한 그룹은 작품의 수로 평가받고, 다른 그룹은 작품의 질로 평가받는다. 학기가 끝날 무렵, 가장 뛰어난 작품들은 모두 수로 평가받는 그룹에서 나왔다. 수백 개의 그릇을 만드는 동안 그들은 실패하고, 고치고, 다시 만들었다. 반면 질로 평가받는 그룹은 완벽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 이론을 연구하다 시간을 다 보냈다.
K는 한참 천장을 바라봤다.
나는 지금 어느 그룹에 있는 걸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K는 알았다. 자신이 두려운 건, 아직 예술가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두려움이 있다는 건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라는 것을.
K는 책을 덮고,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두 번째 책 —
『린 스타트업』
에릭 리스 지음

K는 오랫동안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전시를 열기 전에 모든 작품이 완벽해야 했다. 클래스를 시작하기 전에 커리큘럼이 완전해야 했다. 브랜드를 론칭하기 전에 스토리가 정교해야 했다. 그 준비의 시간 동안 K는 성실했고, 꼼꼼했고,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에릭 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쏟아붓는 노력의 상당 부분은 낭비다.
고객이 원하지 않는 것을 만드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K는 조금 불쾌했다.
낭비라니. 이토록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하지만 그 불쾌함은 서서히 다른 감정으로 바뀌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사람만이 느끼는, 묘한 해방감 같은 것.
린 스타트업의 핵심은 간단하다. 만들고, 측정하고, 배워라. 완벽한 것을 만들어 한 번에 성공하려 하지 말고, 작은 것을 빠르게 세상에 내놓아 반응을 보고, 거기서 배운 것으로 다시 만들어라.
MVP. 최소 기능 제품. 이 개념이 처음엔 스타트업 세계의 언어처럼 들렸다. IT 기업, 앱 개발, 실리콘밸리의 이야기처럼. 그런데 K는 읽다 보니 이게 자신의 이야기라는 걸 알았다.
전시회를 열기 전에 작은 팝업 쇼룸을 열어본 적 있는가. 정규 클래스를 시작하기 전에 소수의 사람에게 먼저 파일럿으로 해본 적 있는가. 브랜드를 론칭하기 전에 단 열 명에게 먼저 보여주고 반응을 들어본 적 있는가.
K는 없었다. 언제나 완성된 형태로, 한 번에, 제대로 하고 싶었다.
"성공은 좋은 계획을 완벽하게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조정하는 과정에서 온다."
K는 그 말을 천천히 되뇌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K는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거창하게 준비하지 않았다. 크게 성공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을 했다. 그리고 반응을 봤다. 반응에서 배웠다. 다시 했다.
처음엔 어색했다. 덜 된 것을 내놓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은 K가 생각한 것처럼 냉혹하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완성된 것보다 과정에 더 흥미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K는 책을 덮고, 일정 하나를 잡았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을 세상에 내놓기로 한 날의 일정을.
K는 오늘도 책장 앞에 선다.
어떤 날은 목적 없이, 어떤 날은 무언가에 쫓기듯. 그러나 늘 결국 이 자리에 서게 된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질문들 — 잘 하고 있는 걸까, 이 길이 맞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게 뭔가 — 을 잠시 내려놓는 유일한 방법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책장은 K에게 일기장 같은 것이다.
어떤 시절엔 철학책이 몰려 있고, 어떤 시절엔 숫자와 도표로 가득 찬 경영서들이 빼곡하다. 한동안 탐정 소설에만 몰두했던 때도 있었다.
현실이 너무 단단하게 느껴질 때, 사람들은 허구 속으로 도망친다. K도 그랬다. 그리고 그 도망이 부끄럽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허구 속에서 찾아낸 진실이, 현실에서 찾아낸 것보다 깊을 때가 많으니까.
손가락이 멈추는 곳에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멈춘다는 건 끝이 아니다. K는 그걸 책에서 배웠다. 작가들이 문장 안에서 숨을 고르듯, K도 책장 앞에서 숨을 고른다. 그리고 다시 걷는다. 아직 쓰이지 않은 챕터를 향해,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을 향해, 아직 만나지 못한 자신을 향해.
오늘 밤 K가 꺼낸 책은 두 권이었다.
내일 밤엔 또 다른 두 권일지 모른다. 아니면 아무것도 꺼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책장 앞에 서서, 손가락을 훑고, 그대로 돌아설 수도 있다. 그것도 괜찮다. 책장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아직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뜻이니까.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K는 불을 끄기 전, 마지막으로 책장을 한 번 더 바라본다.
나란히 꽂힌 책들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서 있다. 기다리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당신이 필요할 때 여기 있겠다고. 말없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K는 불을 끈다.
그리고 내일을 시작하기로 한다.
[Part 4. M - Model & Expand] [12장. 15가지 비즈니스 모델 레시피 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