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가를 위한 비즈니스 수업(아트프레너 성장 소설)_에필로그. 예술가의 정체성
에필로그. 예술가의 정체성

서연은 사무실 문을 열려다 문득 발을 멈췄다.
K의 사무실 이름, '여기, 그곳.'
처음부터 특이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때의 서연은 다른 사람의 독특함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다. 자신의 문제만으로 이미 가득 차서 여유가 없었다.
서연이 문을 열었다. 익숙한 커피 향이 퍼졌다.
"왔어요?"
K가 미소 지으며 맞았다.
"네. 오랜만이에요."
"그러네요. 바빴죠?"
"네, 정신없었어요."
서연이 자리에 앉았다. K가 커피를 내렸다.
"자, 오늘은 과테말라 안티구아. 어때요, 요즘?"
서연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좋아요. 근데 복잡해요."
"복잡해요?"
"음.. 정리가 좀 힘든데.. 일단 숫자부터 보여드릴게요."
서연이 노트북을 꺼내 화면을 K 쪽으로 돌렸다.
화면에는 서연이 진행한 내역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제품 판매, 원데이클래스, 온라인 강의, 콜라보. 각각의 매출과 비용과 수익이 정리되어 있었다.
"지난달 정산이에요. 월 343만 원."
K가 화면을 보다가 다시 서연의 얼굴을 봤다.
"어때요?"
"좋아요. 빚도 갚아나가고 있어요."
"대단해요."
K가 서연의 얼굴을 보며 진심으로 말했다. 서연이 K를 바라보다가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근데요.. 아까 복잡하다고 했잖아요."
"네."
"요즘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어떤 생각이요?"
서연은 잠시 머뭇거렸다.
"... 제가 예술가인지 모르겠어요."
K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DM 확인하고, 주문 체크하고, 택배 보내고, 인스타 콘텐츠 만들고..."
서연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예전에는 하루에 6-7시간 흙을 만졌어요. 지금은 2-3시간? 그것도 주문 들어온 그릇 만드느라 바빠요. 새로운 거 실험하고, 만들고 싶은 거 만드는 시간이 없어요."
서연이 K를 바라봤다.
"이러다 저 그냥 그릇 파는 사람 되는 거 아닌가 싶어요."
K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때요."
K가 천천히 다시 말을 꺼냈다.
"지금도 생각나는 몇 장면이 있어요. 사람들이 나한테 확 집중을 하는 그런 몇 개의 장면이요. 한번은 국어 시간에 과제로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글을 읽는데 친구들이 엄청 재미있어하면서 듣더라고요. "
K가 서연을 보며 웃었다.
"연극을 관둘 때, 그런 게 모두 같이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그런 시간들이, 내가 무대에 섰던 시간이, 내가 누군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연 씨, 왜 도자기 해요?"
"좋아하니까요."
"왜 좋아하는데요?"
"흙을 만지면 마음이 편해요. 그리고 제가 만든 게 누군가의 일상에 들어가는 게 좋아요."
K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6개월 전이랑 달라졌어요?"
서연은 잠깐 멈췄다.
"... 아니요."
"그러면 서연 씨가 하는 게 달라지지 않은 거 아니에요?"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릇을 팔아도, 클래스를 해도, SNS 콘텐츠를 만들어도. 그 이유가 안 변했으면요."
"근데요."
서연이 말했다.
"옛날에 그냥 만들던 때가 그리워요. 팔릴지 말지 생각 안 하고, 만들고 싶은 거 만들던 때."
"음.. 그때 행복했어요?"
서연은 생각했다.
"만들 때는 행복했어요. 근데 안 팔리면 우울했어요. 통장 잔액 볼 때마다 불안했고요."
K가 서연의 얼굴을 바라보다 말했다.
"돈은 예술의 적이 아니에요. 예술을 오래 하게 해주는 연료예요. 돈 없이 예술 하는 건 숨 안 쉬고 달리는 것과 같을 수도 있어요. 오래 못 가요."
서연은 그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
연료. 적이 아니라 연료.
"그래도 역시 예술가니까.. 균형이 중요해요."
K가 덧붙였다.
"돈만 좇으면 예술이 사라져요. 지금 서연 씨가 불안한 건 그 균형이 흔들리는 것 같아서일 수 있어요. 그러면 균형을 맞추면 돼요. 예를 들어, 일주일에 하루는 주문 작업 안 하는 날로 막아두는 거예요. 그날은 그냥 만들고 싶은 거 만드는 날."
"... 그게 가능할까요?"
"억지로라도 해야 되죠. 그리고 No라고 말하는 것도 연습해야 해요."
"No요?"
"주문이 50개 들어와도 감당 안 되면 30개만 받아요. 브랜드에 안 맞는 제안은 거절하고요. 욕심내서 다 받으면 품질 떨어지고, 번아웃 오고, 결국 다 망해요."
No라고 말하기.
눈앞에 돈이 있는데 거절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만, 그것이 방법일 수 있겠다 싶었다.
"서연 씨.."
K가 잠깐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무대에 안 서요. 근데 나는 아직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연극을 할 때도, 국어 시간에도, 지금 서연 씨 앞에서도. 나는 이야기를 잘 만들고 다듬어서 얘기하는 되고 싶었어요."
서연을 K를 바라보았다.
"그게 저한테는 서연 씨의 도자기예요."
이야기를 전하는 것.
그게 K의 예술이었다.
"서연 씨, 제가 알려드린 건 '프레임워크'예요. 도구예요."
"네."
"도구는 쓰는 사람이 중요해요. 같은 망치로 누군가는 집을 짓고, 누군가는 손가락을 다쳐요."
"..."
"그렇지만! 서연 씨는 잘 할 거예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도구를 진짜 잘 쓰는 사람은 스스로 도구를 만들기도 하는 거 알죠? 제가 말한 방법 말고 서연 씨한테 맞는 방법을 잘 찾아봐요."
K가 서연의 컵에 커피를 더 따랐다. 다시 커피의 향이 짙게 올라왔다.
"자, 이제 마지막이네요."
"마지막이요?"
"제 멘토링의 목적은 제가 필요 없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아주 즐겁게도 서연 씨한테 제가 필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이제 가끔 만나서 커피 마셔요."
K가 서연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서연 씨, 좋아하는 일로 먹고사는 건 특권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요. 돈 때문에, 생존 때문에. 서연 씨는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그 특권을 지켜요. 힘들 때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왜를 기억하면서."
서연이 K를 따라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사를 하고 나가다 서연이 돌아보면서 물었다.
"근데요. 왜 사무실 이름이 '여기, 그곳'이에요?"
K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별거 아닌데요. 여기는 지금, 그곳은 언젠가, 여기 오면 그곳이 보였으면 해서요."
"그러네요, 정말."
서연은 '여기, 그곳' 문을 열고 나섰다.

